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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by 물개선생 2006. 12. 19.
얼마전에 "7가지 남성 컴플렉스"라는 책을 힐끔 본적이 있습니다. 꼼꼼하게 보지 않은 이유는 그 책에 나오는 7가지 컴플렉스 유형이 모두 제 이야기 였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랜 시간 저를 괴롭혀 왔던 것은 장남 컴플렉스 입니다. 제 뼈속 깊이 "네가 우리 집안의 기둥이다, 널 중심으로 집안이 다시 일어서야 한다"라는 말이 박혀 있습니다.

중학교 시절은 제게 악몽의 시기입니다. 한분 밖에 없는 삼촌이 돌아가시고, 다음 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곧이어 어머니께 뇌졸증이 찾아왔습니다. 길어야 몇개월이라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노력으로 살아나셨지만, 이미 저희는 가게도 집도 없이 지하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자상하고 부지런하셨던 아버님은 온갖 집안일과 어머님 간병을 도맡아 하시면서 매달 들어가는 생활비며 병원비를 마련하시느라 밤낮없이 일하셨습니다. 밤에는 학교 수위를 하시고, 낮에는 정수기도 팔고 친구 사무실에서 목수일도 하시면서 우리 세 남매를 키웠습니다. 매일 아침 30분 정도 아버님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저희를 꼭 안아주시며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선원이다. 죽어도 다 같이 죽고, 살아도 다 같이 산다" 는 말씀을 하셨지요. 그리고는 저를 따로 불러 장남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시 한번 강조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부담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고등학교 시절 꽤나 방황했던 것 같습니다. 사정이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못된 짓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철이 든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습니다.

제가 스스로 돈을 벌어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을 때, 아버님은 10년 넘게 짊어지던 짐을 제게 맡기고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아버님을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그간의 여러 사정을 아버님께 전해들은 이후로는 여전히 아버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라면 절대 그 오랜 시간 동안 버텨내지 못했을 것 같으니까요. 지금도 아버님은 모 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혼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제게 부담주기 싫다며 끝내 함께 살기를 거부하시면서요.

그간의 사정으로 제가 어머니를 모시게 된지도 또다시 10년 쯤의 시간이 흐른 것 같습니다. 대학원 시절에는 저는 돈만 가져다 줄 뿐 동생이 아주 고생이 많았습니다. 제대하고 바로 학업과 가사 생활을 병행하느라.. 이러다 저 녀석이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을 정도니까요. 어떤 날은 집에 갔더니 곰팜이 냄새 풍기던 지하 셋방이 온통 피냄새로 뒤덮여 있더군요. 너무 힘들어서 손목을 그은 동생이 혼자 남을 어머니가 불쌍해서 함께 가려했던 것이였습니다. 다행히 빨리 발견해서 큰 일은 없었는데, 그런 일은 작은 에피소드로 여겨질만큼 정말 힘든 시간들을 견뎌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동생은 대학원을 마치고 모 식품업체 연구소에서 열심히 제품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동생입니다. 그런 동생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서 제가 어머니를 곁에서 모셨습니다.

열심히 몇 년을 살고 나니 저희에게도 빚이 없어지고, 집이란게 생기고, 차라는게 생기더군요. 저희 어머니는 마치 치매에 걸린 것 마냥 사람을 알아보지는 못해도 참 고운 분이십니다. 아들인 제가 밥을 차려드릴 때도 늘 깍듯이 천사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맙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죠. 당뇨병에 걸려 계셨기 때문에 매일 같이 당뇨 체크를 하며, 음식 조절을 하고 운동도 시켜드렸는데.. 원망스런 세월은 몇 번의 입원 뒤에 그 천사같은 어머니에게 시력마저 앗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제정신도 아닌 분이 앞까지 보지 못하시니 자리를 잠시만 비워도 너무 불안해하셔서 도저히 제가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꽤 오랜 갈등의 시간을 거치고 동생과의 상의 끝에 집 근처의 노인전문병원을 알아보고 그곳에 모셨습니다.

다행히 그곳은 간호사도 친절하고, 두분의 의사가 상주하면서 환자들도 잘 돌봐주는 곳이였습니다. 한가지 부담되는 것은 매달 백만원이 넘는 병원비를 내야 하는 것이였습니다. 한달을 모신 후에 어머니는 점점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또 2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는 매주 몇 번씩 찾아뵈었는데, 대전으로 이사를 온 뒤로는 한달에 한번씩 밖에 찾아뵙지 못합니다. 그게 늘 마음에 걸려서 근처 병원을 알아보았지만, 이곳에서 언제까지 있을지를 기약하기도 힘들고 그 병원과 같이 안심이 되는 병원을 대전에서 아직 찾아내지 못한 이유로 여전히 어머니는 부산에 남아 계십니다.

그런데 몇일 전 어머니 병원비로 모아뒀던 돈을 다 써버린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법 많이 준비해뒀는데도 2년을 버티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병원비를 좀 줄여볼 생각으로 어머니를 장애인으로 등록하는 방법을 알아봤습니다. 어머니를 장애인으로 등록하면 꽤 많은 돈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삶의 절반을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도 못하고 살아야 했던 불쌍한 그 분을 장애인으로 돌아가시도록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곧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장애인이라 불리게 하고 싶지 않은 묘한 오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 며칠 뒤면 어머니를 장애인으로 만들 것 같습니다. 이제는 집도 있고, 차도 있는데.. 조금의 돈을 아껴볼까 하는 마음에 말입니다.

너무 죄송해서 미칠 것만 같습니다. 언제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자신이 있었는데, 오늘 결정내린 이 일이 가슴에 상처로 남아 이젠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